[목회칼럼] 2021.06.20 아버지의 기도

제 나이 즈음에 아버님의 성경책에는 두 개의 기도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성경책의 표지를 들추면 흰 속지가 나오는데, 그곳에 기도문을 붓글씨로 써 놓으셨습니다.

하나는 “주여, 칠십 까지만 살게 해주십시오”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 50대 중반에 세상을 떠나셨기 때문에 아버님은 당신도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큰 병을 앓으신 것은 아니지만 잔병 치레는 많이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님은 당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이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그늘 아래에 동생 여섯과 아들 넷이 있었으니, 그들을 모두 건사 하려면 칠십 까지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칠십  까지만 살게 해 달라고 기도 하셨던 아버님은 올 해 92세이십니다. 기도하고 바랐던 것보다 20년을 넘게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색 하셔서 아버님이 기도하신 만큼만 들어 주셨다면 어쩔 뻔 했나 싶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한 것보다 더 넉넉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네 잔을 마셔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시면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물리쳐 주십시오”라고 하신 것을 기억하고 이렇게 쓰셨을 것입니다. 인류의 죄값이 담긴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마시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버님도 품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가정사에 무심 했던 할아버지로 인해 20대부터 가장 역할을 하셔야 했습니다. 20대부터 가장의 짐을 짊어지고 60대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습니다. 한편으로는 동생들을 결혼시켜 살림을 내 주어야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들을 공부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당신 자신을 위한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낮에는 학교에서 일 하시고 퇴근하면 어머님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청춘을 다 보내셨습니다. 그러느라 심적으로 지쳐 있을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묵상 하면서 끝까지 잔을 마실 힘을 달라고 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 기도대로 아버님은 그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셨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아버님과 잔정을 쌓을만한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버님도 자식들과 놀아 줄 시간이 없었을 것이고, 저도 일찍 아버님 곁을 떠나 객지에 나와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오는데, 아버님을 생각하며 눈물 짓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제게 아버님은 사랑의 대상이기 보다는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생활기록부에 ‘존경하는 인물’에 언제나 ‘아버지’라고 써 놓았습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른 형제들도 그랬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제 육신으로 아버님을 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저는 이렇게 멀리 떨어져 살며 불효를 쌓고 있습니다. 제 아이들은 Father’s Day에 뭐 해 주면 좋겠느냐고 묻는데 아무 대답도 못하는 이유는 저의 불효 때문인 듯합니다.

모든 아버지들에게 그리고 아버지를 그리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