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2020.07.19 누가 심판하는가?

최근에 한국에서 유명인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한국
현대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는 점에서 그리고 죽음 이후에 공과에 대한 치열한
논쟁을 한국 사회에 안겼다는 점에서도 동일합니다.

한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민주주의와 인권과 정의를 위해 싸웠던
사람입니다. 그는9년 동안이나 민선 시장으로 일 하다가 지난 목요일에 북악산
산기슭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를 수행했던 비서로부터 성추행
고소가 접수된 다음 날의 일이었습니다.

서울시는 정해진 의전에 따라 ‘서울 시장장’으로 장례를 치루겠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시민들이 반대 청원을 냈습니다.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의 장례를 국민의 세금으로 치룰 수는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반대 진영에서는 아직 판결이 나지 않았으므로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국가가 정한 의전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장례식은
끝났지만 고인의 공과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또 한 사람은 한국 전쟁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100세의 만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정부는 국가 의전에 따라 그의
시신을 현충원에 안장 하기로 했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그가 세운 공로와 그
이후에 여러 공직을 통해 국가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해방 전에 그가 일본군 장교로 복무 하면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 섰다는 사실로 인해 현충원에 안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의 공과에 대한 논쟁은 고 박원순 시장의 경우처럼 장례가 끝난
후에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한 사람의 일생을 두고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공과 과를 평가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드러나지 않은 공과 과가 드러난 것보다 더 많고 클 수도 있습니다. 혹은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전혀 다른 동기와 의도로 살아 왔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드러난 공과만을 가지고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정확할 수도, 공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절충안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참되고 영원한 심판자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의
심판만이 정확하고 공평합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모든 것—드러난 공과와
숨겨진 공과, 내면의 의도와 동기—을 보시고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이 아무리 크고 과가 아무리 작아도 그분의 저울에는 별 차이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신분이 낮은 사람도 입김에 지나지
아니하고, 신분이 높은 사람도 속임수에 지나지 아니하니, 그들을 모두 다
저울에 올려 놓아도 입김보다 가벼울 것이다”(시 62:9)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일생 동안 쌓아 올린 업적이 아니라 그분께
대한 믿음입니다.

두 사람의 공과에 대한 논쟁을 보면서 마음의 옷깃을 만져 봅니다. 지금도
우리의 내면과 외면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보시는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영원하신 심판자의 평가에 마음을 두고 살기를
소망합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 안에서 신실하고 거룩하게 마지막까지 걸어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