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2019.12.15 큰형들의 교회

최근 수요 예배에서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세 번에 나누어 살펴 보았습니다. 첫 날에는 아버지의 관점에서 그 비유를 보았습니다. 팀 켈러 목사가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Father)이라는 책에서 잘 지적했듯이, 이 비유에서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사랑에 아낌 없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둘째 날에는 둘째 아들의 관점에서 비유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가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선택한 ‘하나님 없는 삶’이 실은 불행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불행의 나락에 이르러서야 제정신이 들었고 죽어도 아버지 품에서 죽겠다는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지난 주에는 세 번째로 큰 아들의 관점에서 비유를 보았습니다. 이 비유에서 가장 문제 되는 사람은 큰형입니다. 탕자는 둘째 아들이 아니라 큰 아들입니다. 그는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고 아버지의 말씀을 어긴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의를 쌓아 올리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동생 일로 인해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립니다. 그에게는 회개하고 돌아온 동생을 품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로 동생을 판단하고 심판했을 뿐입니다. 그런 태도를 우리 말로 ‘꼰대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좁은문>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는 예수님의 비유를 변형하여 단편 소설 <탕자, 돌아오다>를 썼습니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왜 자신을 떠났느냐고 묻습니다. 둘째 아들은 “저는 집을 떠났지 아버지를 떠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언제나 아버지와 함께 있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러면 왜 집을 떠났느냐?”고 묻습니다. 둘째 아들은 “집 주인 노릇을 하는 형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자기 의로 가득한 큰형이 자기 기준을 따라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기에 집이 싫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앙드레 지드 당시의 교회에 대한 비판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율법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큰형 노릇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어야 하는데, 큰형들의 집이 되었던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 소설을 통해 당시 교회의 위선과 살아있는 신앙에 대한 고민을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했습니다. 자기 의를 쌓는 신앙보다는 차라리 회의하고 방황하는 신앙이 더 낫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이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며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목회자들과 평신도들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져야 하는데, 큰형들의 눈초리만 보이고 그들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둘째 아들처럼 회의하고 방황할 만한 품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큰형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시험 들었다고 하고 이단이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이에 깨어 있는 생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교회에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게 할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 안에서 자라는 젊은이들이 회의하며 방황하며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로 자라가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큰형의 꼰대신앙으로 변질되지 않게 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고민하며 기도할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