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2018.03.04 사람은 써 먹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의 ‘미투 운동’이 점입가경입니다.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로부터 때로 규범을 벗어나는 행동을 해야만 창조성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예술가들 중에서 누군가가 회심하고 신앙에 귀의했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 친구 예술은 끝났군!”이라고 대꾸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이 정도로 추하고 악한 행동을, 이 정도로 무심히 저지르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행세를 해 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매일 새로이 드러나는 추행의 숨겨진 모습을 지켜 보면서 저는 계속 묻습니다.

이게 뭘까? 무엇이 이러한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일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자라면서 습득하게 된 세계관과 가치관도 원인의 일부일 것이고, 한국 사회의 마초적 남성관도 문제의 원인일 것이며, 자라면서 겪은 내면의 상처가 원인이 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례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원인이 있다 싶습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심의 결여’가 그것입니다.

절대적 가치를 가진 인격체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람을 대하는 습성이 이런 문제를 만들어 내는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성이 만들어 내는 악한 습성이며 또한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 조장하는 경향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혐오하시는 죄입니다. 창조하신 분이 부여하신 무한한 가치를 피조물이 깎아 내린다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에 대한 존중심의 결여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다양한 악습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성추행이나 성폭행은 다른 사람을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삼은 행위입니다.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을 돈벌이 대상으로 보는 것도 그렇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을 자신의 업적 성취의 도구로 삼는 것도 그렇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자녀를 들볶는 것도 그렇고, 나의 성취를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느낌처럼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또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각 사람에게는 무한의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그 누구도 세속적 기준으로 평가 절하될 이유가 없고,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의 가치를 깎아내릴 권리가 없습니다. 100달러짜리 지폐가 오물에 젖었어도 그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외모와 학력과 지식과 재력에 관계 없이 각 사람은 절대적 가치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내 주변에 사람들을 보내 주시는 이유는 나의 목적을 위해 써 먹으라는 뜻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라는 뜻입니다.

계속되는 미투 운동에 대한 뉴스를 접하면서 “히유, 나는 그런 일이 없이 살았으니 다행일세” 하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때로 사람에 대한 존중심을 잃고 내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람을 대하는 경향에 깊이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든 최대한의 존경심으로 대하겠다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